Baltic sea Contents

발트 3국의 지도

발트해는 지도상으로도 러시아, 핀란드, 스웨덴과 가깝고, 과거 구(舊) 소련의 지배를 받았으나 독립 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로 분리되어 독립을 하였고 이 3국들은 각국마다 문화와 전통도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러시아 연방 서쪽 해안에 있는 바다. 유럽 대륙과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구분한다.
스웨덴, 덴마크, 독일, 러시아, 폴란드, 핀란드에 둘러싸여 있다.
구조적으로 북해의 연장에 해당하는 천해(淺海)인데, 염분도 적기 때문에 북동부 지역은 3~5개월 동안 결빙된다.
연안에는 섬들이 많아 다도해를 이루고 있다. 라틴 어로는 마레발티쿰(Mare Balticum)이라고 한다.
리투아니아 어로는 발타스(baltas)로 '희다'라는 뜻인데, 이 바다의 여러 섬에 하얀 절벽이 많기 때문에 이런 지명이 붙여졌다.
일설에는 고대 스칸디나비아 인의 일족인 바랑그 인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청어, 대구, 송어 등이 어획된다. 연안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스톡홀름, 리가, 칼리닌그라드 등 많은 항구 도시가 있다.
이들은 근세에 한자 동맹의 영향하에서 상업으로 번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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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

이웃 발틱 국가인 에스토니아나 라트비아와는 달리 리투아니아의 문화는 독일보다는 폴란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제정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던 1795년부터 1915년까지는 러시아의 영향을, 1940년부터 1991년까지는 구소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6세기의 서유럽과의 직접적인 접촉 또한 리투아니아의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리투아니아 귀족과 20세기 초의 리투아니아 지식인들은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등에서 사상과 경험을 리투아니아로 가지고 왔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치르는 동안 서유럽과의 직접적인 교류를 통하여 교육, 종교제도, 미술, 문학, 건축, 사상 등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문학에서는 18세기 농노의 생활을 묘사한 크리스티요나스 도넬라이티스(Kristijonas Donelaitis)의 《메타이 Metai》라는 시가 유명하며, 요나스 마치우리스(Jonas Maciulis)는 현대 리투아니아 문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리투아니아는 1980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체슬라브 밀로즈(Czeslaw Milosz) 등 폴란드작가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리투아니아의 영화산업은 1940년대 말부터 시작하여 1989년에는 4편의 장편 영화가 만들어졌고 1990년에는 28편의 단편영화와 24편의 뉴스영화, 4편의 다큐멘터리가 제작되었다.
리투아니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농구이며 몇 명의 프로농구 선수들이 미국과 유럽리그에서 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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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트비아

라트비아어(語)는 리투아니아와 마찬가지로 인도유럽계 어족에 속한다.
라트비아어로 된 가장 오래된 문헌은 1585년에 출간된 교리문답집에서 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러시아인과 다른 슬라브계 사람들의 유입으로 인하여 라트비아 주민의 거의 절반이 라트비아어를 쓰지 않았다.
대신 대부분의 라트비아인들은 러시아어나 독일어를 많이 사용하였다.
그러나 1991년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는 라트비아어 사용을 의무화하고 시민권을 수여하는 기준으로 삼고 있다.
라트비아 문화는 민속문화와 그들의 땅에 대한 애착심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기독교 의식은 가끔 고대관습과 섞이기도 하며 이교도 상징들의 흔적이 가끔 응용예술 분야에 명확히 나타나고 있다.
고대민요는 19세기 중반에 크리스자니스 바론스(Krisjanis Barons)에 의하여 최초로 수집되고 출판되었다.
1888년 안드레지스 펌퍼스(Andrejs Pumpurs)의 방대한 서사시 《Lacplesis》의 출판은 현대 라트비아 문화의 여명을 밝혔다.
자니스 라이니스(Janis Rainis)는 라트비아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작가이다.
현재의 유명한 라트비아 시인 이만츠 지에도니스(Imants Ziedonis)는 라트비아 문화의 발전을 위해 기금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수도 리가에 많은 극장, 오페라단, 교향악단, 서커스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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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토니아

에스토니아의 문화는 농노제가 폐지되고 도르파트대학이 융성하면서 민족의식이 각성된 19세기 동안에 본격적으로 발전하였다.
우선 노래와 전승문학 분야의 발전은 농부적 요소가 1850년 이후의 엘리트적 요소와 만나게 됨으로써 비롯하였다.
문학의 발전은 1810년대 애국시인 크리스티안 자크 피터슨(Kristjan Jaak Peterson)과 함께 일찍 시작되었다.
1944년 독일의 패배로 인하여 많은 에스토니아의 문화엘리트들이 나라를 떠났으며, 스탈린의 압제 아래 에스토니아 문화는 정권의 정치선전 요구로 천시되었다.
1950년 에스토니아 공산당은 숙청을 단행하였는데 예술분야도 예외는 아니어서 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이 형식주의, 국수주의 죄명 아래 추방되거나 유배당하였다.
후르시쵸프의 통치기간인 1960년대에 들어와 외국문화와의 접촉 및 새로운 세대의 작가, 예술가, 작곡가, 시인들의 귀환으로 에스토니아의 문화 활동이 재개되었다.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까지 에스토니아 문화는 정부의 통제 아래 냉각기를 맞았지만 1986년 글라스노스트의 물결로 다시 활발해졌다.
그러나 경제불황으로 인하여 에스토니아 문화는 시련을 겪게 되었는데 1990년과 1991년 종이 부족으로 한정된 양의 책만이 출판되기도 하였다.
최근 에스토니아의 많은 미술가, 시인, 작가들이 정치 활동에 관여하고 있다.
작가 프리드리히 크로이츠발드(Friedrich Kreutzwald), 시인 리디아 코이둘라(Lydia Koidula), 작곡가 아르보 파르트(Arvo Part)가 널리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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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성모마리아상

검은 성모마리아상

이 성모상이 신비한 힘을 지녔다고 믿는 여러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다른 성문들은 모두 파괴되었지만 성모상이 있는 이 문은 유일하게 보존되어있다.
성문이 건립되던 해인 1671년, 어린애가 건물 2층에서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했을 때 아이의 부모는 성문의 예배당을 찾아 성화를 바라보며 성모께 간절히 기도한 다음날 아이가 소생하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1702년 스웨덴 군대가 습격해 와 시민들이 성화 앞에서 기도하는 것을 금지하고 성화를 향해 총을 쏘는 등 성화를 모독하자 성주간 마지막인 부활 전난 토요일 새벽 갑자기 성문의 두꺼운 철제 대문이 스웨덴 군인들 위로 떨어져 2명의 군인이 죽고, 2명이 다쳤다 이 일이 있은 후 전세가 뒤집혀 리투아니아 군대의 반격으로 승리하여 성을 탈환 할 수 있었다. 그 이후 빌뉴스 시민들은 이 성화를 영험하게 여기고 경건한 마음으로 아꼈다고 한다.